서울국제고등학교 역사 동아리 ‘두빛나래’가 첫 탐방을 다녀왔다.
동아리 계획에 있는 논문을 쓰기 위해 부장이 선택한 장소는 숙정문이었다.
숙정문은 지리적으로 학교와 가까울 뿐만 아니라, 논문에 취지에 적합한 장소였다. ‘문화재의 잘못된 수리와 복원’을 주제로 작성될 논문에 왜 숙정문이 선정되었을까?
먼저, 숙정문에 대해 알아보자. 숙정문은 조선 시대의 서울 사대문 중 북쪽에 위치한 문이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하고, 곧 1396년 도성을 쌓았는데 정도전이 성문의 이름을 지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통치이념인 인의예지에 따라 동대문(흥인지문), 서대문(돈의문), 남대문(숭례문)이라고 지었지만, 백성이 지혜롭게 되면 나라를 다스리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며 북문은 숙청문이라고 이름 짓게 되었다. 숙청문은 중종 이후의 기록부터 숙정문이라고 남아있는데 바뀐 이유는 아직 알지 못한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숙정문을 열면 부녀자들이 음란해진다고 주로 닫아놓았다고 한다. 가뭄이 심할 때는 음의 기운을 띠는 이 문을 열어두었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숙정문은 1.21 사태 등 다양한 사건과 얽혀 일반인에게 개방이 되지 않다가, 故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개방되었다.
그렇다면 숙정문의?어떤 부분이 잘못 복원되었을까??
[이미지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4기 박수연 기자]
[이미지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4기 박수연 기자]
첫째로 이 사진을 보면 천장에 그림이 없다. 다른 문에는 봉황과 같은 그림이 있지만, 숙정문에는 유일하게 그림이 없는데 그 이유는 원래 문루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76년 숙정문을 복원할 때 문루가 본래부터 없었다는 주장과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에 복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으로 갈렸었다. 태조 창건 당시 문루가 있었다는 기록에 의해 문루를 건축하였지만, 여전히 많은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연산군 때 옮겨진 기록인 한양도성도에 따르면 동쪽으로 조금만 이동하고, 문루를 건축하지 않았다고 남아있다.
그 밑에 위치한 사진은 월단으로, 문루가 복원되기 전에 단독으로 있었다.
[이미지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4기 박수연 기자]
두 번째로 숙정문의 편액은 현재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읽게 쓰였지만, 이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작성 된 현판이며, 좌우 순서가 바뀌어 있다.
숙정문을 관람하기 위해서는 신분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 또한, 청소년은 단독으로 출입이 불가하고, 성인과 동반 관람을 해야 한다. 동반 관람을 할 때에도 청소년 역시 여권이나 학생증을 꼭 지참하여야 한다. 청와대 경비에 중요한 위치이기 때문에 군인들이 지키고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절기(3~10월)에는 09:00~16:00시까지, 동절기(11~2월)에는 10:00~15:00시까지 운영하고,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두빛나래’는 이번 탐방을 통해 잘못된 복원의 사례에 대해 알아볼 수 있었고, 쟁점에 관해 토론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사회부=4기 박수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