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독립 선언’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아마도 서울 탑골 공원에서 일어난 3∙1 운동만이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보다 한 달 앞선 2월 8일, 일본 유학생들이 일본의 심장부인 동경에서 독립을 외친 2∙8독립 선언이 있었다. 그리고 지난 8일, 재일본한국 YMCA 한국문화관에서 2∙8 독립선언 99주년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 기념식에는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 이찬범 주일대사관 총영사, 애국지사 유가족들을 비롯하여 재일동포 등 250여 명이 참석하였다. 이번 행사는 동경한국학교 어머니 합창단이 부르신 ‘2∙8 독립선언의 노래’를 시작으로 이석민 재일한국유학생연합회 회장이 2∙8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 등을 하였다.
여러분들에게 낯설 수도 있는 2.8독립선언의 시작은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8년 재일 유학생들은 당시 미국 우드르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주장하고 재미 한국인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했다는 보도와 파리 강화회의 및 국제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여러 약소민족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하는 등 세계의 여러 정세를 보아 지금이 독립을 하기에 가장 적당한 시기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1919년 1월에 웅변대회를 열고 독립을 위한 운동을 해야 한다고 결의를 하고 실행위원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여 2.8 독립선언문,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청원서를 작성하고 송계백을 국내로 이광수를 상해로 파견하였다.
[2.8 독립선언의 주역들]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6기 최운비기자]
그리고 1919년 2월 8일, 유학생들은 각국 대사관, 언론기관, 조선총독부, 일본국회 등으로 선언문, 결의문, 청원서를 발송했다. 또한 이날 오후 2시,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600여 명의 유학생들이 모여 대표 11명이 서명한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했고 독립선언문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그 후 이들을 감시하던 일본 경찰이 기독교청년회관에 모인 유학생들을 해산시켰고 9명이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2.8 독립선언문에서 일본 유학생들은 일제의 침략을 강경하게 고발하고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또한 이 선언에 참가하였던 학생들의 대다수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후에 일어나는 3.1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하는 등 영향력을 이어나갔다.
이렇게 의미 있고 내년이면 100주년이 되는 2.8 독립선언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알려졌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국제부=6기 최운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