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전주성심여자고등학교의 1학년 학생들은 아주 특별한 장소에 찾아갔다. 올바른 역사 인식과 정치적 가치관을 성립하기 위해 방문한 그곳, 바로 제주4.3평화공원기념관이었다. 본격적으로 전시관에 들어가자, 학생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정숙하고 진지한 태도로 관람에 임했다. 모두들 보이는 것마다 찬찬히 읽은 후 휴대폰을 들어 촬영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지 않았음에도 그들 모두가 집중했다.
1948년 4월 3일, 그날 제주도에서 일어난 끔찍한 비극을 대중들은 흔히 '제주4.3사건'이라 부른다. 하지만 아직도 이 사건을 명명하는 것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당시의 사건을 보는 시각이 모두 다르다 보니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는 것이 현재 상황이다. '제주4.3사건'은 당시 제주에서 경찰 및 우익 청년단의 탄압 중지와 단독정부 수립 반대 등을 내걸고 일어나던 무장봉기와 이후 계속된 무력 충돌들이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제주도는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었지만 광복을 맞이한 이후로부터는 건국준비위원회와 지방의 자생적 조직들이 결합하여 인민위원회를 구성한 후, 활발한 건국 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 1945년 11월 9일 제주도에서 미군정이 실시되며 그 움직임도 시들어져 가는 듯했다. 그리고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행사 당시 미군정의 권력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고 그 현장에 있던 어린아이가 군정경찰의 말발굽에 치여 사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3.1 발포사건이다. 그리고 3.1 발포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정부와 미군정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분노와 불신이 강하게 싹트기 시작한다.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9기 하예원기자]
위의 사진이 바로 4.3 백비이다. 백비란 어떤 까닭이 있어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을 뜻한다. 말로는 설명하지 못할 수많은 아픔들이 비석에 그 어떤 것도 새길 수 없게 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 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기념관에서 나온 후 다음 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몇몇 학생들은 제주4.3사건을 검색하며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이었던 김 모 양은 '기념관의 퇴장로가 바닥을 제외한 삼면이 희생자들의 사진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돌도 되지 않은 아기들의 사진이 꽤나 많은 것을 보고 마음이 너무나도 아팠다. 또한 이런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굳건히 했다'고 전했다.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9기 하예원기자]
언젠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슬픔을 맞닥뜨렸을 때, 많은 사람들은 이를 '말 못 할 슬픔'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덜 서러워야 눈물이 나올 정도라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말을 못 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으로 슬픔에 잠겨 눈물도 흘리지 못하는 것은 더 이상 슬픔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것은 고통이다. 우리는 이 고통을 겪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고통을 기억할 수 있고, 잊지 말아야 할 기억으로 바꿀 수도 있다. 이제 더 이상은 제주도민들의 몫이 아니다. 제주4.3사건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가 기억하고 추모해야 할 역사이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사회부=9기 하예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