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18기 노윤서기자]
3·1 독립운동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극복하여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고 사회 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펼친 운동이다. 독립운동을 펼친 48인의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첫 번째로 백범 김구이다. 1893년 동학 농민 운동을 지휘하였고 이후 의병이 되었다. 이듬해 명성 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를 죽여 사형을 당할 뻔했지만 고종이 형벌을 주었다. 1910년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에 연관되어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다가 3·1운동 후에는 상하이로 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다.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이 된 후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여 대일 항쟁을 이끌었다. 8·15광복 이후에는 신탁 통치와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에 반대하여 남북 협상을 주장하며 평양에서 회담을 열었지만 협상에 실패하였다. 이후 정부 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로 머물다가 1949년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저서로 <백범일지>가 있다.
두 번째로 우사 김규식이다. 1918년 8월 신한청년당이 조직되자 이에 가입하고 1919년 2월 한국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되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외무총장에 파선되었으며, ‘한민족의 일본으로부터 해방과 한국의 독립국가로의 복귀에 관한 청원서’와 ‘한민족의 주장’을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여 일제 침략의 악랄함과 한국 독립의 필연성을 호소하였다. 동년 8월 6일에는 외신기자 클럽에서 80여 명의 각국 유력인사가 초청된 가운데 한국독립군의 타당성과 일제 침략의 흉계를 폭로하는 등 5개월 동안 동분서주하며 세계여론에 호소하다가, 여운홍, 김 탕과 함께 동년 8월 9일 미국으로 갔다. 1919년 8월 말 임시정부 구미위원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군자금을 임정에 송부하는 한편 3·1 독립운동을 계기로 고조된 분위기를 활용하여 한국 독립문제가 미국 하원에서 상정 토의되도록 하였다.
세 번째로 유관순이다. 1919년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수학한 뒤 예수교 공주교회 부인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의 교비생으로 편입된바 고등과 1학년 때 삼일운동이 일어나서 경성에서 시위운동에 참가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서 교회와 학교로 순방하면서 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권고하고 각지의 교회와 유림계의 찬성을 얻어 3월 1일(음) 병천에서 수천 명의 군중을 모아서 선창으로 만세시위를 지도하였는데, 그의 부친 중권과 모친 이 씨는 당시 왜적의 총에 희생되었고 김구응, 최정철(채 씨), 김상헌 등은 동일 살해되고 유관순 열사는 주모자로 체포되어 유치장에서 오빠 관옥을 면접하였으나, 아무 영문도 몰랐으며 적의 고문에 자신의 처사였다는 것뿐 일체 언급을 피하였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받고 공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 수감되었으며, 1920년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옥중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20년 9월에 악형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으며, 이때 나이가 18세의 소녀였다.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가 서훈되었다.
마지막으로 우의 윤봉길 의사이다. 윤봉길 의사는 충남 예산군 덕산에서 태어났으며, 19세부터 야학을 경영하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29년에는 원진회를 설립하여 농촌 개혁을 실시하고, 1930년에 중국으로 망명, 상해로 건너가 모직공장 직공, 세탁소 외교원을 거쳐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천장절을 기하여 상해사변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하회가 상해 홍구 공원에서 개최됨을 듣고 일본 시민 차림으로 오전 11시 40분 식대 정면에 투탄하여 일본의 침략 원흉 시라카와 등을 처단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 한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며 감격해 하고,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육군 중앙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체포된 의사는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5일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윤봉길 의사가 남긴 말이 있다. “장부출가생불환” ‘사내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사회부=18기 노윤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