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떠나는 故 노회찬 국회의원 운구 차량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6기 허기범기자]
7월 27일(금) 오전 10시, 국회의사당 정현관 앞에서 여야의원과 각계각층 인사, 2천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故 노회찬 국회의원 영결식이 엄수되었다. 오전 9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발인을 마친 후 장례행렬은 국회로 이동했다. 7월 26일(목), 故 노회찬 국회의원은 정의당장에서 국회장으로 승격되었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고, 국회의원 299명이 장례위원을 맡았다.
영결식은 문희상 국회의장의 영결사와 이정미 정의당 대표, 심상정 정의당 국회의원, 김호규 금속노동자의 조사 낭독 순으로 진행되었다. 또한, 故 노회찬 국회의원의 생전영상을 상영하였고 장조카 노선덕 씨가 유족을 대표해 조사를 낭독한 데 이어 대법원장과 여야 대표, 동료 국회의원들 순으로 헌화와 분향이 진행되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영결사에서 “제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다가 이 자리에서 노회찬 의원님을 떠나보내는 영결사를 읽고 있는 것입니까? 태양 빛 가득한 계절이건만 우리는 모두 어두운 터널에 들어선 듯 참담한 심정으로 모여있습니다. ··· 노회찬 의원님 당신은 정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은 항상 시대를 선구했고 진보 정치의 상징이었습니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만류에도 거대 권력과 싸움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낭독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을 드러냈다.
심상정 정의당 국회의원은 “당신은 인천에서 저는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으로 알게 되어 이후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진보당 그리고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노회찬 심상정은 늘 진보정치의 험준한 능선을 걸어왔습니다.”라고 눈물의 조사를 낭독했다. 故 노회찬 국회의원과 심상정 국회의원은 노동운동가로 시작해 정계로 진출하면서 대한민국 진보정치의 역사를 함께 써내왔다. 그러면서 주위 사람들은 두 사람을 닮은꼴 인생이라며 성을 따서 ‘노심초사 인생’이라고 불렀다.
▲故 노회찬 국회의원 ‘국회장’ 영결식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6기 허기범기자]
유가족과 동료 국회의원들은 영정과 위패를 들고 故 노회찬 국회의원의 사무실이 있는 의원회관 510호실로 이동했다. 故 노회찬 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사진과 흔적들을 본 유가족과 이정미 대표 등 동료 국회의원들은 오열했다.
영결식은 1시간만인 오전 11시에 마무리되었지만, 시민들은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오후 1시까지 헌화하였다.
故 노회찬 국회의원은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제적 공진화 모임으로부터 모두 4,000만 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7월 23일(월) 오전 아파트에서 투신해 사망하였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사회부=6기 허기범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