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3년 파리 시 도지사로 취임한 유젠 오스만은 황제의 행정력과 부르주아 자본의 힘을 앞세워 3차에 걸쳐 파리 전역에 걸친 대규모 도시개조사업을 시행하게 되었다.
오스만은 다섯 가지 원칙 아래 도시를 파헤쳤다. 첫째, 교통을 위해 도시를 관통하는 50개 대로를 건설하였다. 둘째, 가로축에 개선문과 콩코드 광장, 루브르궁 같은 거대한 상징물을 설치했다. 셋째, 도로와 주요 관공서는 파리시가 직접 개발하되 나머지 부지는 민간에 분양해 간접 개발하는 혼합방식을 택했다. 넷째, 상·하수도와 학교, 병원 등 인프라를 확보하였다. 다섯째, 녹지 공간 확보에 힘을 쏟았다. 오스만은 1870년까지 재임하며 시내 비위생 구역을 정리하고 하수도 600㎞와 방사형 도로망, 철도 환상선을 깔았다.
이렇게 재건축되는 부지에 정식 임차 관계를 맺지 않은 채 살고 있던 사람들은 거의 보상금을 받지 못하였고, 재입주의 권리 또한 인정받지 못한 채 퇴거당하였다. 재개발로 인한 도심의 부동산은 투기로 인해 가격이 대폭 상승했다. 재개발을 피한 몇몇 도심의 노동자들도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했고, 도심에서 추방당해 북서쪽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이주하게 된다. 노동자계급이 이렇게 중심부에서 축출되어 외곽으로 쫓겨남에 따라 파리의 근교까지 개발과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대체로 부유한 부르주아 사람들은 탐탁지 않은 빈민 구역이 사라진다는 것을 환영했다. 반면에 토지 소유자와 정식 임차인들은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게다가 도시 채권을 구입한 이들은 이 사업에 재정상의 지분 또한 확보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스만의 도시계획은 계급 계층에 따른 도시 공간의 사회적 분화를 심화시켰다.
오스만은 이러한 도시 개발 과정에서 하나의 도시 경제로서 파리가 겪고 있는 특수한 위기의 맥락에서 자신이 직면한 거시 경제적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 강렬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거리 장식의 디자인을 꼼꼼하게 검토했다(가스등, 가판대, 심지어는 베스파시엔(vespasiennes)이라 불리는 도로 소변기의 디자인까지도). 그는 세세한 문제에까지 신경 써서 정렬하는 데 강박적으로 집착했다. 그는 센강에 걸린 술리 다리의 각도를 조정하여 바스티유의 원기둥에서 다리를 거쳐 팡테옹(Panthéon)까지가 일직선상에 놓이도록 했고, 엄청난 기계공학적 묘기를 부려 승리의 기념주를 옮겨 새로 만들어진 샤틀레 궁전의 중심부에 설치했다.
게다가 오스만이 건축가 베이이(Bailly)에게 상업 병원(Tribunal de Commerce)의 돔을 제거하라고 지시한 것은 당시 괴상하다고 여겨졌는데, 오스만의 주장은 그래야 그 건물이 새로 건축된 세바스토폴 대로를 따라 내려오는 시선 위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국지적으로 비대칭이 되겠지만 도시라는 더 큰 규모에서는 대칭적 효과를 창출하도록 한 것이다.
오스만이 사업을 총지휘하던 17년 동안 새로 들어선 건물이 7만 5천 동으로, 대부분 5층 이하로 형태와 구조가 똑같아 ‘오스만 양식’으로 불린 신축 빌딩의 1층에는 노천카페와 음식점이 입주하고 위층에는 부자들의 살림집이 들어섰다. 이에 따라 파리 도심은 급속하게 부촌으로 변해갔다. 반면 건물을 짓느라 빈민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가옥 2만 동이 헐렸다. 멀쩡한 건물도 오스만이 지도에 그은 직선에 따라 잘려나갔으니 불만도 컸다. 그렇기에 ‘도시 재개발의 모범 사례’라는 평가 이면에 ‘매혹적인 옛 도시 파리에 대한 분별없는 학살’이라는 비판 또한 꾸준히 제기된다.
다만 오스만이 해임되었을 무렵 그가 착수한 도시 변형 과정은 이미 굉장한 동력을 얻은 뒤였으며, 거의 중단시킬 수 없는 상태였다. 오페라대로의 완성과 같은 사례로 대표되는 ‘오스만화’(Haussmannization: 간단하게 대로화라고도 일컬어지는 도시 개조 과정)는 그가 해임된 뒤에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러한 작업의 가치가 워낙 훌륭하게 입증되었고, 건축가와 행정가들의 명성도 탄탄하게 확립되었으며, 도시 계획 전개의 논리도 기반이 튼튼하고 전체 개념도 지극히 잘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파리는 그 뒤 30년이 지난 뒤에도 대체로 오스만이 규정한 노선에 따라 개발되었다.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6기 신유진기자]
결국, 오스만이 남긴 것은 위대한 기념물이 아니라 파리라는 “도시”이다. 위대한 야망, 국가 최고 지도층의 강력한 지지, 책임감을 가진 집행관, 재정‧법적 장치, 능력 있는 전문가 집단, 그리고 20년 가까운 일관된 작업 기간이라는 가히 완벽한 조건하에 건설된 이 도시는 한 세기가 훨씬 지난 오늘날까지도 큰 변화 없이 훌륭히 도시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파리의 19세기 도시 미학은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오스만의 파리처럼 박원순의 여의도를 만드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7월 10일 리콴유 세계도시상을 받기 위한 싱가포르 기자회견에서 여의도 마스터플랜을 공개하였다. 최고 50층까지 건물 높이를 올려 수변 스카이라인을 조성하는 내용으로, 여의도를 주거·상업·녹지 공간이 어우러진 초고층 국제 금융 도시로 만들 박원순 시장의 야심을 담고 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여의도를 통으로 재개발할 것”이라며 “공원과 커뮤니티 공간을 보장하면서 건물 높이를 높일 계획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그는 여의도를 “신도시에 버금가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여의도 일대 종합적 재구조화 방안(여의도 마스터플랜)’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자세한 내용은 올해 하반기에 발표될 예정인데, 현재까지는 여의도 전역을 상업 지역화하여 초고층 건물로 재건축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여의도의 시범, 진주, 대교, 한양, 삼부아파트는 현재 일반주거시설로 규정되어 35층 고도 제한을 받고 있지만, 서울시가 용도 변경을 허가하면 최고 50층 건물로 재건축할 수 있다. 그 외에 한강변에 있는 여의도 초·중·고등학교를 재배치하고 한강공원 녹지 공간을 확대하는 안도 거론되고 있다. 아예 한강변을 선착장으로 개발하여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현재 고려되고 있다.
서울시는 여의도 교통도 정비할 계획이라고 한다. 서울시는 상습 정체 구간인 여의도와 노량진 사이를 잇는 길을 새로 만들고 여의도와 용산을 잇는 새로운 교통수단을 검토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추가적인 철도 시설 계획은 없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개발 이후의 인구밀도가 증가에 대비하여 도로 폭을 확대하는 등 대로변 상의 정비는 예정되어 있음을 시사하였다.
이러한 박원순 시장의 파격적인 발표 이후 여의도 일대는 들썩이고 있다. 아파트 매매 관련 전화 문의가 평소의 5배 이상으로 늘어났으나 집주인들은 매물을 거의 대부분 거둬들이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의도는 애당초 각 조합에서 재건축 계획을 개별적으로 추진하고 있던 터라 마스터 플랜에 묶인 상황이 불만족스러운 주민들도 상당수 있다. 특히 지난달 20일 시범아파트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 개발 기본 계획 변경안을 제출했으나 심의 보류 결정을 받았다. 여의도 재건축 단지 중 가장 먼저 신탁사를 선정해 자체적으로 재개발을 추진하던 시범아파트 주민들의 불만이 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2011년 ‘한강 르네상스’를 추진하던 오세훈 전 시장의 계획 백지화를 고려해보면 박원순 시장의 여의도 개발은 쉽지 않아 보인다. 당시에 오 전 시장 또한 여의도 통합 재개발을 추진했다. 11개 아파트단지, 61만4301㎡의 용도를 3종 일반주거지역에서 상업지역으로 변경하는 방식의 고밀도 개발이었으나 기부채납 비율을 조합원들의 예상(25%)과 다르게 40%로 설정하게 되면서 주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혀 결국 무효화 되었다.
도시 개발보다는 도시 재생에 초점을 맞추던 박원순 시장의 파격적인 여의도 도시 개발 계획이 성공하여 오스만처럼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여의도를 탈바꿈시킬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경제부=6기 신유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