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4기 유림기자]
2017년 7월23일 오전 8시,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가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9세다.
김군자 할머니는 1926년 강원도 평창군에서 태어났다. 10대에 부모님을 여의었고, 16살 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약속했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17살 때 중국 지린성 훈춘 위안소로 강제 동원 되었다. 3년간의 지옥 같은 위안부 생활에서 벗어나려 탈출을 여러번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그 때마다 잔혹한 구타를 당해 결국 왼쪽 고막이 터졌고, 그 후 할머니의 왼쪽 귀는 평생 들리지 않았다. 7차례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해방 후, 몇 번의 죽을 고비 끝에 고향에 돌아와 전 결혼을 약속했던 그와 함께 생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났다. 홀로 상처를 안고 외로이 생활하다 1998년 부터 나눔의 집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함께 생활했다.
2007년 2월 마이크 혼다 미국 연방하원이 주최한 미국 의회의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자신이 겪었던 잔혹한 과거사를 생생하게 증언했다. "해방 후 38일을 걸어 조국에 돌아왔다"며 "위안소에서 하루 40여 명을 상대했고 죽지 않을 만큼 맞았다"고 일제의 끔찍한 만행을 폭로했다.
김군자 할머니는 한국 정부로부터 받은 배상금을 모아 기부했다. 자신처럼 부모없는 학생들이 공부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재단에 1억원을 기부하였고, 그 외에 나눔의 집에 1천만원, 한 천주교 단체에 1억5천만원 등을 내놓았다.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4기 유림기자]
"생전에 사과 받겠다", "내가 살아있는 한 위안부의 진실을 알릴 것이다", "아무것도 필요 없다. 일본의 책임 있는 정치인의 진심 어린 사과면 족하다"라고 말했었던 김군자 할머니.매주 수요 집회에 나가 위안부 실상을 알리는 데에 앞장섰을 만큼 일본의 진정한 사과를 받기 위해 힘썼다.
부산 일본 영사관 앞 소녀상의 철거를 반대하고, 한일 위안부 합의 재검토를 주장하며, 세계에 일본군 위안부의 만행에 대해 알리려하는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생존자가 37명으로 줄은 지금, 이제는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다 더 진정성 있는 해결책과 대안을 제시해야 할 때이다.
빈소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차병원 장례식장 지하 1층 특실이다. 발인은 25일이며 장지는 나눔의 집 추모공원이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사회부=4기 유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