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13일. 중국의 인권운동가인 류샤오보(劉曉波 | Liu Xiaobo)가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 사람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이유는 중국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중국 민주화 운동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류샤오보는 1955년 12월 28일 지린 성 장춘에서 태어났다. 지린 대학 중문과를 나온 그는 이후 베이징 사범대를 거쳐 뉴욕의 컬럼비아 대학의 버나드 컬리지에 방문 학자로 일하게 되었다. 그는 문학을 전공했으며 “미학과 인간의 자유”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1989년 6월 4일, 중국에서 톈안먼 사태가 발생했다. 중국의 학생, 노동자, 시민 등이 민주화를 요구하며 톈안먼 광장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이때 정부에서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탱크 등 각종 무기를 동원해 시위 진압을 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방문 학자로 일하고 있던 류샤오보는 바로 중국에 돌아와 톈안먼 사태에 동참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에서 류샤오보를 포함한 4명을 4군자라고 불렀는데, 저우둬, 류샤오보, 허우더젠, 가오신이 그들이다.
이후 류샤오보는 체포되어 유죄 선고를 받지만 톈안먼 사건 당시 대규모 유혈사태를 막으려 했다는 그의 공적이 인정되어 바로 사면된다. 하지만 그가 다시 감옥을 가게 된 것은 한참 후인 2008년이었다. 2008년 12월 10일은 유엔의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이었다. 이 뜻깊은 날에 그는 중국의 ‘톈안먼 사건’이나 ‘문화대혁명’ 같은 독재 정권 치하에 일어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비판하고 이런 사건이 다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통치 체제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려고 했다. 이 헌장이 바로 [08헌장]이다. 하지만 그는 이 헌장을 준비하다가 발각되어 ‘국가정권 전복선동’ 혐의로 징역 11년을 살게 된다. 이후 류샤오보는 중국의 인권을 위한 운동을 했다는 평가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류샤오보는 감옥에 갇혀 있었다. <08헌장>의 이름이 <08헌장>이 된 계기가 된 [77헌장]을 작성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은 사람들을 모아 류샤오보의 석방을 청원하였다. 참고로 [77헌장]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반체제 운동을 상징하는 문서이다. 유럽의 중국학회 또한 36개국의 학자 800명의 서명을 담은 서한을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 주석에게 전달했으나 중국에서는 내정간섭이라며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결국 노벨 평화상 수상은 류샤오보 없이 진행되었다.
류샤오보는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가석방돼 치료를 진행하다 다발성 장기 기능 상실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류샤오보가 이렇게 병으로 죽게 내버려둔 중국 정부에 대한 비판이 생겨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류샤오보가 병에 걸린 것이 중국 정부의 책임도 아닌데 그들이 비판을 받는 것일까? 지난 5월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난 후 류샤오보는 유럽이나 미국에 가서 치료를 받고 싶다고 강력하게 요구했으나, 중국은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후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과 국제기구, 인권 단체, 미국 등 많은 사람들이 그를 도와주기 위해 애썼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154명이 나서 류샤오보와 그의 아내인 류샤를 미국에서 치료받게 해주자며 중국 정부에 요청했고, EU, 미국 등 많은 국가들과 단체에서 그를 돕기 위해 노력했지만 중국 정부에서는 "중국 사법기관이 수감자의 각종 권리를 법에 따라 보장하는 만큼 다른 국가는 중국 사법주권을 존중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말길 바란다"며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런 사건은 결국 중국이 아직 완벽한 민주화를 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중국인도 아닌 우리가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단순한 중국의 애국자가 아닌, 중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고, 그가 살아온 행적과 발자취가 우리나라의 민주화 운동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중국도 우리나라와 같이 완전한 민주화를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한다.
[이미지 제작=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4기 박우빈 기자]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국제부=4기 박우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