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14기 맹호기자]
이복형 대사와 그의 아내 홍갑표 이사장은 인생의 30년을 중남미에서 보냈다. 그들은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얻은 경험과 지식, 수집품을 중남미문화원에 담았다. 이복형 대사가 중남미 지역 4개국 공관장을 지내며 수집한 것들에는 중남미 고대 유물부터 식민 지배기, 근현대 미술, 조각 작품이 있다. 이 대사의 말에 따르면, ‘서구 문화와는 달리 친근하고 동양적이며 우리 전통문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고 한다. 문화를 알아보기 전, 우선 그들의 역사를 이해하고 넘어가자.
인류는 시베리아, 알래스카, 북아메리카를 거쳐 남아메리카 지역에 정착했다. 정착한 원주민의 이름은 인디오다. 그들은 부족사회를 이루었으며, 농사를 지었다. 인디오들은 감자와 고추부터 옥수수까지 재배했고, 에콰도르나 페루 등의 해안 지역에서는 어족 자원을 식량으로 소비했다. 이후 원주민들은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을 발전시키고 잉카 제국을 건국한다. 문화적, 기술적으로 수많은 유적을 남겼지만, 콜럼버스의 상륙 이후 원주민들의 고유한 문화는 몰락하게 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지배하에 있던 남아메리카인들 사이에는 가톨릭이 널리 퍼졌고, 정치적, 문화적으로 이들 식민 지배국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남아메리카가 ‘라틴 아메리카’로 불리게 된 것도 로망스족이라고도 불리는 라틴인이 남아메리카 대륙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찬란한 문화가 발전했지만, 라틴인의 침략으로 몰락한 중남미의 문명을 알아볼 차례다.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문명
미술관 제1전시실에서는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 중앙아메리카와 안데스 지역에서 발전했던 토착 인디언 문화를 소개한다. 구대륙의
고대 문명과 마찬가지로 고대 아메리카의 문명은 여러 왕국과 제국, 대형 기념물과 도시, 예술품, 광석에서 금속을 골라내는 방법인 야금술 문헌들이 특징이다. 아메리카 문명은 농업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그
기원은 후기 약 20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에서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식용작물의 재배는 긴 세월이 지난 후, 중앙아메리카에서
정착 농경이 시작된 기원전 1500년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아즈텍 문명
아즈텍 문명은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지금의 멕시코 중부와 남부지역에서 대제국을 건립하고 지배했다. 아즈텍이라는 부족명은 멕시코 북부에
있었던 이들의 발상지 흰 땅이라는 뜻의 ‘아스 틀란’에서
나왔다. ‘테노 츠’라는 시조의 이름을 따서 ‘테노 치타족’이라고 불렸고, 텍스코코호의 신화적인 명칭 메츨리아판(달의 호수)을 따서 멕시카족이라고도
했다. ‘테노 치마’에서 테노치티틀란이라는 아즈텍족의 대도시
명칭이 생겨났다. 또한 ‘멕시카’에서 아즈텍의 수도를 대신하게 된 도시와 주변 계곡을 가리키는 멕시코라는 이름이 생겨났으며, 현대의 멕시코 전체를 가리키게 되었다. 이 종족의 기원은 확실하지
않지만, 아즈텍 전설을 살펴보면 12세기 무렵 멕시코 북부
고원지대에 살던 수렵 채집이었던 듯하다.
마야 문명
마야문명은 고전 마야와 신 마야로 나뉘는데 고전 마야문명은 320년경 시작되었다. 그들은 1년을 365일로 정하고, 춘분과 추분을 알고 있었다. 600년부터 약 200년간은 마야문명의 전성기였다. 그들은 천문학과 수학을 발달했지만 10세기 말 갑작스레 사라졌다. 이후 신 마야 제국은 11세기 초 발생했다.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은 마야문명 최고의 의식이었다. 그들은 카카오로부터 초콜릿을 최초로 만들었고 치클레 나무에서 껌을 만들어냈다. 천연고무 또한 중요 수출품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15세기 중반 권력 분쟁이 극대화되어 거의 무정부 상태에 이르렀다. 16세기 초 스페인이 이곳에 왔을 땐 이미 찬란한 마야문명은 사라지고 난 후였다.
잉카 문명
잉카란 15세기부터 16세기
초까지 남아메리카의 중앙 안데스 지방을 지배한 고대 제국을 칭하는 말이다. 동시에 그 사회적 중심이었던
부족과 그 부족의 지배계급의 사람들에 대해서도 잉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잉카족은 케추아족이라고도 불리며, 남방의 아이마라족이나 북방의 창카족 등과 함께 페루 인디오의 한 집단이었다.
페루 남부, 쿠스코 주 중부 우리 밤바 계곡 지대 해발
2,280m 정상에 자리 잡고 있는 잉카의 유적지 마추픽추는 ‘나이 든 봉우리’라는 뜻으로 산자락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어 공중도시라고도 불린다. 마추픽추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많다. 잉카인들이 스페인의 공격을 피해 산속 깊숙이 세운 것이라고도 하고, 군사를 훈련해서 후일 스페인에 복수하기 위해 건설한 비밀 도시, 또는
홍수 같은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해 고지대에 만든 피난용 도시라고도 한다. 서쪽의 시가지는 신전과 궁전, 주민 거주지이고 주위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중남미의 문명을 소개해주는 전시관을 둘러보고 나면, 야외 전시장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중남미 문화권의 돌 벽화와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야외 전시장에 위치한 종교 전시실은 가톨릭 성당의 모습을 갖고 있다. 왜 중남미 문화원에 성당이 있는 것일까? 중남미 문화원 근간을 이루는 것이 가톨릭이기 때문이다. 16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남아메리카를 정복한 후, 중남미 지역에는 가톨릭이 널리 퍼진다. 식민 지배 기간 동안 대도시에 큰 성당들이 들어서기 전부터 개척지나 대농장, 정복자들의 저택 내에 예배당들이 건립된다. 당시 세워진 대성당들은 라틴 아메리카 바로크의 건축 양식을 갖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 바로크 양식은 스페인 바로크 건축 양식 중 추리게라 양식과 아메리카 원주민 특유의 화려한 디자인이 결합하여 탄생한 양식이다. 사진에서 보듯 유리창을 통해 다양한 빛이 들어오고, 장식과 무늬가 화려하다. 중남미 문화원의 레타블로 성당도 라틴 아메리카 바로크 건축 양식을 따른 건축물이다. 성당 내부의 주제단에는 성모 마리아상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조각, 천사상 등이 있다. 천장과 벽면에는 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이 있는 나무 조각상이 걸려있다.
남미 지역은 오늘날 세계 인구의 15%를 차지하며 수많은 천연자원을 갖고 있다. 중남미 지역과의 교류는 우리나라의 발전에도 중요하다. 우리나라에 없는 인적자원과 천연자원이 중남미에는 풍부하기 때문이다. 세계화 시대에 우리나라와 중남미 지역은 공동 발전을 위해서 서로 문화적, 경제적으로 많은 교류를 해야 한다고 중남미 문화원의 공동 설립자인 이복형 대사는 말한다. 교류는 민간의 상호 문화 이해를 기반으로 할 때 잘 이루어질 수 있다. 세계 경쟁 시대에 생존하고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데에도 다양한 문화를 편견 없이 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우리 학교 학생들도 중남미 문화원을 통해 문화에 대한 이해를 확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중남미 문화원은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요일에 오전 10시~ 오후 6시에 이용할 수 있다. (11월~3월에는 오후 5시 폐관)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국제부=14기 맹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