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제작=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8기 윤현정기자]
조선을 위해 일했던 일본인 변호사를 아는가? 그는 바로 '후세 다츠지' 이다. 그는 일본제국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한 농가에서 3녀 2남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메이지법률학교를 졸업해 검사로 임명되었다. 그가 담당했던 사건 중 한 모자가 동반자살하는 사건에서 어머니가 살아남았는데, 어머니는 살인미수로 기소되게 된다. 그다음, 그는 법의 미성숙함과 부조리를 느껴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고, 40세의 나이에는 인권 변호사가 되었다. 그는 특히 조선인의 부당함과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애썼다. 1920년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었던 2.8사건,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한 혐의로 붙잡힌 박열과 가네코를 변호하였고, 의열단이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다 붙잡힌 황옥 경부 폭탄 사건, 동양척식주식회사에 의해 벌어지던 토지 수탈문제 등을 다루면서 조선인을 위한 변호사가 된다.
이러한 후세의 행동을 일본의 치안 당국이 좋아할 일은 없었다. 결국 후세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변호사 자격정지와 징역 3개월을 받고 수감됬었다. 그는 또한 우리나라가 해방된 직후에는 '조선의 독립을 축하한다. 이날은 나에게도 자유의 날이다.'라며 축하의 말을 건내주기 까지 하였다.
그는 7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2004년에는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정부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게 되었다. 조선을 지배한 나라인 일본에서 건너온 이 일본인 변호사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과의 대결이나 경쟁에서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간혹 일본인에 대한 비난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우리 민족이 일본으로부터 얻은 아픔의 크기가 매우 크고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저지른 만행은 마땅히 사과받아야 하지만 후세라는 일본인이 우리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자신의 나라를 기꺼이 등지고 조선을 위해 힘써준 은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광복절을 맞이하여 그의 이름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독립을 위해 싸워준 열사들의 억울함을 대변해주던 이 일본인의 이름을 말이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사회부=8기 윤현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