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10기 맹호기자]
3월은 새 출발의 달이다. 수많은 학생들이 신학기를 맞이하며 새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난다. 역사적으로도 3월은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갖고 있다.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 이라고도 불리는 3.1운동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근본인 임시정부의 등장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3.1 운동이 발발하기 전, 일제의 탄압은 당시 국민들의 반감을 증폭시켰다. 일제는 매국노들을 회유하고 매수하여 우리나라가 합병을 원하는 것처럼 위장했고, 세계에 이를 알렸다. 또한 일제는 헌병에게 즉결 심판권을 부여했다. 이는 재판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헌병 경찰이 언제든지 사람들을 구속, 고문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식민지배의 근본적 목적인 경제 수탈을 위해서, 일제는 어업, 광업 등에서 이권을 챙겼고, 토지조사령, 부동산 등기령, 부동산증명령 등을 통해 많은 땅을 강탈했다. 1916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소유한 땅은 11만 정보가 넘었다. 토지 수탈을 진행하면서 일제는 소수 양반지주의 땅은 보호해 주었다. 소규모 농민들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이러한 농민들은 이후 3.1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일제의 만행에 대한 저항은 의병(독립군) 활동과 계몽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주로 농민, 상인, 광부, 승려가 의병을 이루어 활동했고, 일제를 피해 간도와 연해주에서 군관학교를 세워 무력저항을 이어나간 사람들도 있었다.
계몽 운동은 학교 설립을 수반했다.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을 설립했고, 스크랜턴 부인은 '이화학당'을 설립했다. 의료 선교사 알렌은 광혜원을 세움과 동시에 의학교를 설립하여 의료진을 배출했다. 계몽 운동이란 인재 배출을 의미했고, 따라서 군사적 저항과 함께 많은 학교가 세워졌다.
3.1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당시 미 대통령이었던 28대 대통령 윌슨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전쟁 이후의 강화 조약에 대한 구상을 밝히며 '민족 자결주의'를 말했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세계의 많은 식민지 국가를 고무했다. 상해, 미국, 간도와 연해주, 동경과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민족 자결주의에 대한 소식을 듣고 대대적인 시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국민 모두가 참여하는 3.1운동을 일으켰다.
3월 1일 오후 2시, 태화관에서는 선언식이 진행되었다. 같은 시각 탑골 공원에서는 4,50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만세를 외쳤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경했던 사람들까지 동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3월 1일 당일에는 12개 지역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이를 전후로 총 2464건의 시위/휴교/파업이 일어났다.
독립 운동 단체들이 의도한 대로, 고종의 장례식 때 상경한 사람들은 고향에서 만세 시위를 이끌었고, 결과적으로 3.1운동에 약 100만 명이 참여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국내뿐만 아니라, 동경, 지린, 용정, 연해주, 하와이와 필라델피아 등 해외에서도 만세 소리가 울려 퍼졌다.
3.1 운동은 대한국민의회, 한성임시정부,고려임시공화국, 신한민국임시정부 등 임시정부의 수립에 영향을 미쳤고, 이들은 상해임시정부로 통합되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바탕이 되었다.
<3.1운동 전후 시위 (일부)>
- 3월 10일 서울 휴교령, 학생들이 고향에서 만세 시위 이끎.
- 3월 4일 강서군 사천시장, 시위대가 사천헌병주재소 습격, 헌병 및 보조원 4명 살해
- 3월 6일, 맹산군 맹산면에서 시위 발발
- 3월 18일, 약 2만 명이 강화 읍내시위 참여
- 4월 2일, 통영 장날 시위에 기생 5,000명이 선두에서 시위 참여
- 4월 1일,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명이 시위 참여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국제부=10기 맹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