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사임당, 빛의 일기’가 방영을 시작하며 배우 이영애가 맡은 ‘신사임당’으로 대중의 시선이 쏠렸다. 방영 전에는 대중들의 냉담한 반응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신사임당의 업적이 그리 대단한가’, ‘차라리 유관순 열사를 중심으로 한 작품을 만들어라’, ‘왜 오만원권에 신사임당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등 신사임당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도 상당히 많았다. 신사임당, 그녀는 도대체 누구길래 위인으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저런 평가를 받는 것일까. 신사임당의 생가, 오죽헌 방문을 통해 신사임당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았다.
1. 교양을 갖춘 예술인
신사임당은 1504년 강릉 북평촌(지금의 오죽헌)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7세 때 안견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릴 정도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풀벌레를 그려놓은 그림을 말리려고 밖에 내놓으면 닭들이 쪼았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그녀는 섬세하고 생동감 있는 사실화를 그렸다. 율곡의 스승인 어숙권은 사임당이 안견 다음가는 화가라며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경홀히 여길 것이냐고 사임당을 극찬하였다.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도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사임당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함과 정결함을 엿볼 수 있다. 강릉부사였던 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여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하였다. 또한 이이의 [선비행장]에는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경전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라고 기록되어있다.
2. 학문을 갖춘 아내, 어머니
예술적 재능을 발휘하면서 신사임당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역할에도 성숙한 면모를 보였다. 남편 이원수가 학문에 정진하겠다는 약속을 번번이 어기자 남편이 나라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길 간절히 원했던 그녀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되겠다 하였다. 그러자 남편 이원수는 깜짝 놀라 학업에 전념하였다. 또한 남편이 이기(후에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큰 화를 입힘)의 문하에 가서 노닐자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그의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 권하였고, 아내의 말을 받아들인 이원수는 후에 화를 당하지 않았다. 남편 이원수는 사임당의 그림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기도 하고, 아내와의 대화를 중요시 여겨 대화로부터 늘 배움을 얻었다고 한다.
또한 신사임당은 자녀들을 현명하게 교육하여 부덕과 모성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의 훈도를 가장 많이 받은 자녀는 바로 셋째 아들 ‘이이’다. 이이는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여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등을 자세히 서술하였다. 사임당은 이이뿐만 아니라 다른 자녀들도 예술가, 스승 등으로 훌륭히 키워 ‘겨레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신사임당은 선덕여왕처럼 최초의 여왕으로서 업적을 남기거나 유관순 열사처럼 애국활동을 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충분히 재조명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조선의 유교적 사상이 기대하는 여성의 역학을 현명하게 해냈으며 이것에 그치지 않고 독립적 자아로서 예술인의 삶을 살기도 하였다. 성숙한 역할의 조화를 이룬 그녀는 교양과 학문을 갖춘 완전한 예술인이자 현모양처이다. 이런 그녀의 삶이 현대인에게 긍정적으로 회자되길 바란다. 또한, 그녀의 삶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그녀의 삶이 녹아있는 강릉의 오죽헌을 방문해보길 추천한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국제부 4기 박혜민기자]
과거와 현재의 이상적인 여성상이 달라지긴했어도, 신사임당은 충분히 5만원권에 얼굴을 올릴 자격이있는 위인인것같습니다. 기사덕분에 신사임당에대해 몰랐던 정보들도 많이알게 됬네요. 좋은 기사 잘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