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지단 18기 노윤서기자]
이응로는 1094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고암과 죽사.
'이응노'는 잘못된 표기이다. 이응노의 '노'는 한자어 미련할 '로', 노나라 '로'이기 때문에 "이응로"라고
표기해야 한다. '이응노'는 이름을 소리 나는 대로 쓴 것이다.
이응로는 1920년 염재 송태회를 사사하며 문인화에 인문 한다. 1922년 서울에 가 해강 김규진 문하에 입문 후 호 ‘죽사’를 받는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 사군자부에 <청죽>을 출품해 첫 입선을 한다. 1933년 한학자 규원 정병조에게 호 ‘고암’을 새로 얻었다. 2년 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마츠바야시 게이게츠가 운영한 덴코화숙, 혼고 양화 연구소,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그림을 익혔다. 1945년 귀국하여 예산 수덕사 수덕여관에 머문다. 이후 상경하여 남산동에 고암 화숙을 개설하고 조선서화동연회, 단구미술원 설립에 참가하였다. 1960년 프랑스로 건너와 파리에 정착했다.
파리 파게티 화랑과 전속 계약을 맺는다. 1964년 파리 세르뉘쉬 미술관에 동양미술학교를 설립하고 수묵화를 가르친다. 1967년 의용군으로 끌려간 아들 소식을 들으러 동베를린에 있는 북한 대사관에 여러 차례 방문한다. 7월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 대전과 안양 교도소에 수감된다. 2년 후 형 집행정지로 3월에 가석방된다. 옥중작 300여 점을 가지고 나와 예산 수덕여관에서 요양 후 5월에 프랑스로 다시 돌아간다.
1980년 한국에서 발발한 5.18 민주화 운동을 유럽 언론을 통해 접하고 <군상>연작을 시작했다. 1989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개최된 개인전 기간 중 타계하여, 파리 시립 페르 라세즈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사회부=18기 노윤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