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동쪽에 위치한 섬나라 일본, 그중에서도 남쪽에 있는 또 다른 작은 섬 오키나와. 현재 오키나와는 동양의 하와이라 불리며 아름다운 해변과 다양한 해양 스포츠로 인기 있는 여행지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특히 오키나와만의 특별한 옛 문화 유적지가 많은 사람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다. 이러한 유적지를 만든 주인공은 바로 옛 오키나와를 다스린 류큐 왕국 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류큐 왕국은 어떠한 왕국이었기에 웅장하고 위대한 유산들을 많이 남길 수 있었을까?
이 왕국은 1429년~1879년까지 존재했던 일본과는 다른 독립 국가였다. 또한,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번성한 비무장 국가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조선왕조실록’에도 조선과 중국(당시 명나라)에도 여러 가지 물품을 수출하고 수입하며 교역을 하였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러다 류큐 왕국의 무역에 뜻밖의 행운이 찾아왔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해안에 자주 나타나는 왜구들 때문에 강력한 해금 정책을 펼치고 무역을 단속했다. 이에 따라 왕국은 1년에 한 번으로 조공 무역이 정해지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 비교해 정해진 조공 무역 횟수가 많았고, 특히 명나라의 조공 무역은 받은 조공보다 더 많은 물자를 하사하기 때문에 활발한 무역을 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많은 발전 또한 이루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중국은 유럽까지 무역 수요층을 확대해 나갔고 한정된 조공 무역으로는 늘어나는 상업적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무역의 자유화가 활발하던 시기가 되어 중국은 1567년 해금 정책을 완화 시킨다. 그리하여 중국 상인들은 직접 동남아시아로 나가 해상무역을 하고 일본의 에도막부는 네덜란드와 직접 교역을 시작하며 류큐 왕국의 무역 시장이 수축한다. 설상가상으로 1609년 사쓰마 번의 침략을 받았고 이후 300여 년간 해외무역의 통제를 받았다. 1879년 메이지 유신을 단행한 일본의 침략이 추가되면서 류큐 왕국은 일본에 무너져 버렸고 오키나와현으로 일본에 편입되었다.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6기 김하은기자]
이러한 왕국에 남겨진 대표적 유적지로는 수도인 ‘슈리’에 있는 ‘슈리성’, 최대의 성지인 ‘세 이화 유타 키’ 그리고 수많은 성터가 남아있다. 특히 슈리성은 중국식 느낌을 풍기는 붉은 외관을 하고 있어 당시 중국과 많은 외교가 있었음을 증명해 보인다. 한때는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동남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주도하였지만 결국 약 450년의 역사는 일본에 서서히 묻혀갔다. 하지만 오키나와에 남은 류큐 왕국만의 위대한 유산들과 정신을 통해 사람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국제부=6기 김하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