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일 학생의 날을 맞이하여 '인천 원당중학교'에서는 학생회를 중심으로 등교 맞이 행사가 진행되었다. 쌀쌀해진 날씨에 잔뜩 움츠리고 등교하는 학생들에게 사랑의 초코파이를 전달하는 행사였다. 1학년 서○○ 학생은 "학생의 날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고, 선물을 받은 기분이 들어 즐겁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기분을 전했다. 또한, 행사를 진행한 학생부 3학년 정○○ 학생은 "평소보다 일찍 등교하여 행사를 준비하고 쌀쌀한 날씨의 야외활동이 힘들었지만 즐거워하는 학생들을 보니 보람되었다. 오늘의 행사로 학생의 날에 대해 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교내 중앙통로에서 행사진행 중인 인천 원당중 학생회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5기 정다윤기자]
▲교문 앞에서 행사진행 중인 인천 원당중 학생회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5기 정다윤기자]
▲제88회 학생의 날 축하합니다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5기 정다윤기자]
그렇다면 '학생의 날'은 언제, 어떻게, 왜 정해졌을까?
1953년 10월 문교부령으로 학생의 날이 정해지게 된 계기를 알아보려면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1929년 10월 30일 오후 5시 30분경 광주를 떠나 나주역에 도착한 통학 열차에서 광주 중학교의 일본인 남학생들이 조선인 여학생의 댕기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자 조선인 남학생이 이에 항의하며 조선인 학생 30여 명과 일본인 학생 1백여 명의 집단 싸움으로 번지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고통을 받으며 일본에 대한 분노가 가득할 때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교사들이 모두 일본인이었던 학교에서 통학 열차의 싸움으로 조선인 학생들만 꾸지람을 들으며 더욱 분노가 쌓여가던 중, 일왕의 생일이며 음력으로 개천절인 11월 3일 드디어 우리 민족의 감정이 터지게 된다. 학생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여학생 희롱 사건에 대해 편파 보도를 한 광주일보사를 습격해 항의하였으며, 신사참배를 하고 돌아오는 일본인 학생들과 두 차례에 걸친 대대적 충돌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조선인 학생들만 일방적으로 처벌을 받자 광주에 있던 모든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고 이것은 전국적인 학생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광주 학생 운동은 통학 열차 안의 우연한 충돌 사건으로 일어난 것이 아닌 일본 식민통치에 대한 분노가 그 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한 것도 단순히 광주학생의거를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장래를 위해 늘 깨어 있으며 민족을 바르게 이끌어 온 젊은 학생 모두를 기억하고 그들의 희생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의미로 보아야 한다.
1954년 6월 10일 전국 학생들의 성금으로 광주 서중학교(당시 광주고등보통학교)에는 '광주학생운동 기념탑'이 세워졌다. 그리고 그곳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사회부=5기 정다윤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