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김중배의 칼럼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의 첫 구절이다. 저 죽음은 당시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사망한 박종철 군의 죽음을 뜻했다. 하지만 저 죽음은 한 사람의 희생만을 가리키진 않았을 것이다. 해방 직후부터 시작된 이념 갈등과 분단을 이용해 독재의 무기로 사용한 위정자들에 의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수많은 사람들을 가리킬 것이다. 국가 치안유지와 반공을 명목으로 쿠데타를 일으킨 어느 군인과 민주를 부르짖던 5월의 광주를 피로 붉게 물들인 또 다른 군인들의 군홧발이 아직도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그 군홧발이 짓누르고 있는 것은 국가도, 민주주의도 아니다. 치안본부 대공분실, 국가보안법, 국가안전기획부 등 어제의 것들이 가리키고 있는 그것이다. 바로 그것, 북한이다.
‘빨갱이’, ‘무장공비’, ‘북괴’, ‘기쁨조’ 북한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들이다. 70, 80년도에도 북한은 ‘테러집단’이며 악의 축이었다. 그리고 이 인식은 2000년도에만 반짝 나아졌을 뿐, 현재도 이 인식은 쉽사리 바뀌지 않고 있다. 지난 9일 성사된 남북회담만 하더라도 그렇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대부분의 시선은 냉담하다 뿐일까 오히려 비판적인 내용이 지배적인 듯하다. 애초에 통일 필요성에 대한 국민인식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였다. 지난 2017년 박주화 통일연구원 연구관리본부 연구부장이 발표한 <평화적 분단과 통일: 2017 통일에 대한 국민인식 조사 결과와 합의> 보고서에 따르면 남북한 통일의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57.8%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지난해보다 11.5%p하락한 수치이다.
분단의 군홧발이 우리를 짓밟고 있다. 군홧발이 짓밟고 짓밟을수록 우리의 허리에 매어진 철조망이 조여 온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매년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다 가족 얼굴 한 번 만나보지 못한 채 희생되는 저 죽음은 약 2400명에 달한다. (2017년 9월 26일 발표된 현대경제연구원의 자료) “그의 죽음 앞에서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의 호곡이 피어난다. 그 호곡을 잠들게 하라. 새로운 하늘, 새로운 땅, 새로운 사람들이 피어나게 하라. 그것이 그의 죽음을 영생으로 살리는 길이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의 마지막 구절이다. 사실 본 칼럼과 통일과는 거리가 멀다. 내용 맥락도, 상황도 배경도 다르다. 결정적으로 1987년의 ‘저 죽음’은 마침내 6월 항쟁과 2017년 촛불 항쟁으로 피어났다. 하지만 매년 죽어가는 이산가족들의 ‘저 죽음’은 조용히, 북한에 대한 혐오감에 묻히어 시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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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2015년 7월 20일 분단 70주년을 맞아 통일부는 제일기획과 공동으로 철조망을 이용해 제작한 '통일의 피아노'를 공개했다. 또한 '통일의 피아노'에서 울려 퍼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을 배경으로 미니 다큐를 제작한 바 있다. 영상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대용씨는 "이 노래는 언젠가 고향땅에 닿을겁니다."라고 말한다. 어제의 것들이 오늘을 괴롭게 하고, 오늘의 괴로움이 내일을 가린다. 하지만 찾아올 내일을 위해 오늘을 버티는 사람들이 있다. 이 노래가 고향땅에 닿을 내일을 위하여.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사회부=5기 여승헌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