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가사키 시의 하시마 섬은 1890년 미쓰비시합자회사에 의해 본격적인 해저탄광이 시작되었고, 이후 미쓰비시 석탄광업의 주력 탄광이 되었다. 점차 인구가 증가하여 좁은 섬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일본 최초의 철근콘크리트 고층집합주택 ‘30호동’이 건설되기도 했다. 일본은 하시마 섬이 일본의 근대화, 산업화 모습을 보여준다는 이유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신청하였고,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 철강, 조선, 탄광’이 세계유산으로 최종 등재되었다.
탄광 폐광 후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황폐해진 하시마 섬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3기 장우정기자,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하지만 하시마 섬은 우리 민족의 아픔이 깃든 곳이다. 석탄을 생산할 인구수가 부족하자, 일본 정부는 '국가 총동원법'을 통해 조선의 젊은이들을 강제 징용했다. 태평양 전쟁이후 194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인 약 600명이 강제동원 되었다. 이들은 하루 12시간씩, 노동 환경이 열악한 탄광에서 노역을 했다. 이 중 일부는 부적합한 채굴 조건으로 인해 병에 걸리거나 탄광 사고, 영양실조 등으로 사망하였으며 도망을 시도하다 바다에 빠져 익사하기도 했다. 하시마 섬에서 일하는 일본인들은 다른 일본인보다 몇 배 더 많은 임금을 받았기 때문에 부유하게 살 수 있었던 점과 반대로, 하시마 섬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적절한 대우를 받기 못한 채 착취당했다.
한국이 하시마 섬의 세계유산 등재를 반대하자 일본은 강제 노역에 대해 명시하는 조건을 통해 간신히 등재하였으나, 직후 태도를 바꾸어 강제 노동의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하시마 섬에 갈 때 나누어주는 책자의 ‘탄광의 일’ 부분에서도 강제징용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시마 섬에 대해 설명하는 가이드도 강제징용이 아니라 하시마 섬의 역사, 근대적인 시설에 대해서만 설명할 뿐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태도를 보아 그들은 하시마 섬의 어두운 면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 위안부 문제를 포함하여, 과거에 일어난 잘못을 항상 부인하고 잊어버리려고 하는 태도를 또다시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일본과 다른 태도를 가져야 한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이 역사를 기억하고 일본으로부터 사과를 받아내야 하며, 또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국제부=3기 장우정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