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토요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 학생들을 인솔하는 교사, 외국인 관광객 등으로 붐볐다. 도대체 이들은 어떤 전시를 보러 온 것이었을까? 그들의 발걸음은 제각기 달랐지만, 대다수의 발걸음은 상설전시관의 가장 끝에 위치한 특별전시관, 바로 황금인간의 땅, 카자흐스탄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 전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카자흐스탄 문화체육부, 카자흐스탄 국립박물관이 주최하고 아시아문화원과 KBS미디어 등이 협력 기관으로 참여했다.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9기 하예원기자]
특별전시관으로 들어가기 전, 관람객들을 반기는 말 두 마리가 있다. 말들의 머리와 몸 위에 얹어진 화려한 장식들이 시선을 끈다. 이것들은 말갖춤을 복원한 것으로, 기원전 4~3세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하며, 카자흐스탄 동부 베렐 쿠르간에서 출토되었다. 말갖춤이란, 말을 부리기 위하여 말에게 장착하였던 각종 장구들을 말한다. 그 기능과 사용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불려진다. 붉은 장식들이 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듯 생동감이 느껴지는 두 마리의 말을 지나고 나면, 대한민국과 카자흐스탄의 역사를 시대별로 비교해둔 간략한 연표와, 카자흐스탄의 위치와 지리, 자연환경 등을 소개한 글과 그림 등이 있다. 본격적으로 전시실에 입장하고 나면, 가장 먼저 관광객들을 맞이하는 문화재가 있다. 바로 계림로 보검이다. 1973년 경주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계림로 보검은 동서 문물 교류의 대표적인 예시로 알려져 있다. 그 이유는 신라 금제품과 구리 함량에서 명백한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4~6세기 천마총, 금관총, 교동 출토 금관의 구리 함량은 모두 1% 미만인 반면에, 계림로 보검의 구리 함량은 3.0%~3.3%로 나타났다. 이는 2~7세기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와 헝가리 출토 금제품의 구리 함량과 유사하다. 과학적인 조사를 통하여 이런 사실을 알아내었고, 결국 계림로 보검은 동서 문물 교류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계림로 보검 후에는 다양한 모양의 장식들이 뒤를 잇는다. 나무 위의 새, 식물 잎사귀, 말 등등을 본떠 만들어진 금속 장식들이 있다. 그렇게 관람 순서를 따라 걷다 보면, 카자흐스탄의 위풍당당한 대표 문화재, 황금인간을 보게 된다.
황금인간은 1969년 고고학자인 아키셰프가 카자흐스탄의 대표적인 고대 고분 유적지인 이식 쿠르간에서 발견하여 세상의 주목을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황금인간은 전시품으로서, 끝이 뾰족한 모자를 쓴 사카인, 즉 사카 티그라하우다(Saka Tigrahauda)를 재현했다. 무덤에서 발견된 사카인 남성은 15~18세 정도이고, 키는 약 168cm로, 화려한 황금장식으로 치장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사카인이 바로 황금인간으로 불리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 황금인간을 왕자로 보기도 하고 친위부대인 코미타투스(comitatus)의 일원으로 보기도 한다.
▲황금인간을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9기 하예원기자]
카자흐스탄은 중앙유라시아에 위치한 국가로 잘 알려져 있다. 중앙유라시아 사람들은 건조한 초원과 사막, 산악 지대가 펼쳐진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유목 생활을 하였다. 유목민은 여름에는 초원에서 지냈고, 겨울에는 상대적으로 온화한 반사막과 사막으로 이동하였다. 카자흐스탄에서 초원, 반사막, 사막은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유목민에게 유기적으로 연계된 거주 공간이었다. 또한 '말'과 이동식 숙소인 '유르트'는 유목민의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유르트를 장식하는 카펫과 공예품, 각종 마구와 유제품 등은 유목민이 삶을 영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전하였다. 호신물을 담는 장신구인 '보이투마르'가 그 예시 중 하나이다. 또한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의 유르트 제작에 관한 전통 지식 및 기술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어있다.
▲카자흐스탄 현지의 고려인 인터뷰 모습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9기 하예원기자]
전시는 카자흐스탄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조명하며 끝을 맺는다. 여기에서 고려인이란 옛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의 독립 국가 연합 전체에 거주하는 한민족을 이르는 말이며, 독립 국가 연합이란, 1991년 소련(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독립한 10개 공화국의 연합체 혹은 동맹이다. 러시아, 몰도바, 벨라루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이 공식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1937년 스탈린 정부는 일본의 스파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명목으로 고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카자흐스탄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처음에는 이방인으로 살아가야 했지만, 특유의 성실성을 바탕으로 오늘날 카자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발돋움하였다. 과거 연해주의 고려인 지도자로 활동한 홍범도 장군이 대표적이다. 현재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은 대부분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으며, 카자흐스탄에서 살고 있는 고려인은 약 10만 명에 이르며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이 카자흐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 활약상을 보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들은 원치 않은 발걸음을 떼며 고향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고, 최소한의 생존을 최대한의 목표로 삼아 모든 나날들을 살아내었다. 언어도, 생각도 통하지 않던 그곳에서조차 그들은 대한민국을 잊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던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헤어진 가족들과 만나는 것, 가족들과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불과 며칠 전에도 스무 살이 된 기념으로 음주를 즐기던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 세 명이 길을 묻는 고려인 두 명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한 사건이 있었으며, 아직도 많은 고려인 청소년들이 학교를 비롯한 사회에서 다양한 차별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암 투병 중인 아버지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불법 취업한 고려인 후손이 강제 출국당하는 일도 있었다. 이것은 크나큰 모순이다. 한국인이 해외에서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에는 분노하며 비판하는 것처럼 고려인이 대한민국에서 범죄의 피해자가 되었을 때에도 역시 분노하며 현실을 꼬집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제가 왜 이방인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살날만을 고대해왔습니다. 하지만 사회로부터 부조리한 차별과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라고 한 고려인 노동자가 말했다. '이방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기준은 개인의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이렇게 사랑하고 바라는 이들에게, 대한민국에서의 원활한 생활을 위해 밤낮으로 한글과 대한민국의 문화를 공부하는 이들에게 이방인이라는 호칭은 너무나도 냉정하다.
이 전시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카자흐스탄에 대하여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진 역사 교육을 받은 것이다. 살아있는 역사 교육의 현장, 국립중앙박물관에 방문하여 청명한 하늘을 즐기며 역사 속으로 한 걸음 나아가는 한국인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사회부=9기 하예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