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최해인 대학생기자]
이순신 장군이 어떤 전쟁에서 맹활약했는지 아는 사람은 많다. 그런데 이순신 장군과 친한 명나라 장군이 조선에 귀화한 후 타국인 조선에서 평생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두사충'이다. 기자가 소개할 우리 동네의 문화재는 대구 수성구에 있는 두사충의 재실인 ‘모명재’의 이야기다. 두사충과 모명재에 대해서 사료와 문화재를 통해서 복합적으로 살펴본다.
모명재를 설명하기 전 모명재에서 제사를 지내며 기리고 있는 두사충에 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두사충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시인이라 불리는 시성 두보의 후손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지를 세우기 위해 당시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라는 자격으로 조선에 오게 된다. 일본과의 전쟁으로 인해 위기를 맞은 조선을 위해 두사충은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을 세우며 승전의 기쁨을 누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두사충은 벽제관 전투에서 참패했고, 풍수지리에 맞지 않는 곳에 진지를 세웠다고 참패의 원인으로 지목받아 파직당할 뻔했다.
그러나 당시 우의정 정탁과 같은 조선 대신의 변호로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세운 진지의 문제가 아닌 병사들의 사기 문제라는 것이 밝혀지며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큰 화를 피한 두사충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조선보다 자신의 고국인 명이 먼저 멸망할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는 명이 멸망하면 청의 백성이 될 텐데 그것은 싫다며 압록강에서 명나라 장군들과 병사들을 배웅하고 조선에 귀화한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가 귀화한다고 하니 두 팔 벌려 환영하고 원하는 곳에 살게 해주는데, 이런 과정을 거쳐 두사충은 현재 대구에 ‘경상감영공원’이 있는 자리에 처음 정착했다고 한다.
약 2년 후 그 자리가 경상감영부지로 선정되었고, 두사충은 나라를 위한 일이라며 그 땅을 흔쾌히 내어준다. 그리고 수십 년이 흘러 두사충이 죽음을 예감한 나이가 됐다. 두사충의 유언을 받들어 두사충의 후손들은 형제봉 앞에 1912년 ‘그리워할 모’, ‘명나라 명’을 써서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라는 뜻의 모명재라는 재실을 세웠다.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최해인 대학생기자]
모명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두사충을 기리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만들어진 재실이다. 이런 모명재의 가장 큰 특징은 많은 편액이 걸려있는 것이다. 먼저 모명재에 들어서기 전 모명재 대문 위에는 ‘만동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여기서 만동문이라는 편액에서 ‘만동’은 “모든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간다”라는 말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근본을 잊지 않겠다’라는 말로 해석된다.
그리고 대청을 기준으로 왼쪽 방과 오른쪽 방에 각각 편액이 걸려 있다. 왼쪽 방에는 ‘경모당’이라는 편액이 있고, 오른쪽 방에는 ‘숭정유루’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경모당’이라는 뜻은 모명재를 지은 후손들이 두사충을 존경한다는 뜻을 담았고, ‘숭정유루’라는 뜻은 ‘숭정이 남긴 누각’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를 의미한다.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최해인 대학생기자]
두사충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오면서 이순신 장군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명이 일본과 휴전을 하면서 명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1597년(선조 32년) 일본이 휴전을 깨고 정유재란을 일으키자 명나라 수군의 장군인 진린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출병하게 되고, 함께 온 장군이 명나라의 수군을 지휘하는 진린 장군인 덕분에 이순신 장군과 오랫동안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두사충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략에 관해서 이야기도 하고 이순신 장군이 두사충에게 보내주었던 ‘봉정두복야’라는 시에서는 “북에서는 고락을 함께했고, 동에서는 생사를 함께 했다. 그러니 오늘은 한 잔의 술로 정을 나누세”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시를 통해서 민족을 초월하면서 깊은 우정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 문화부=7기 대학생기자 최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