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3월, 마산시의 거리에는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봄이 찾아왔다. 아직 채 피지 못한 꽃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날, 겨울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약간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던 한적하고 조용한 거리가 총성과 연기, 그리고 함성으로 뒤덮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48년 5.10 총선거의 결과로 수립된 제헌 국회의 간접 선거로 선출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강력한 반공 정책을 펼쳐 아시아의 공산 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임기가 진행될수록 그는 반민주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3선 금지 조항을 초대 대통령에게는 적용하지 말자는 개헌안이 정족수 미달로 부결된 것을 억지로 반올림하여 통과시킨 사사오입 개헌이다.
3선 금지 조항의 무력화로 이승만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 상대측 후보의 급사로 별다른 방해 없이 당선된다. 총 12년간의 임기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권력을 향한 그의 욕심은 계속되어서,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상대측 후보 조병옥이 사망하여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시되었다. 그러나 고령인 이승만은 유사시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부통령까지 자신이 결정하고자 했고, 자신이 지목한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부정을 저질렀다. 선거 유세 방해는 물론이고, 부정 투표와 투표함 바꿔치기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전국 각지의 국민들은 부정 선거에 항의하고자 거리로 나섰고, 그중에서 사태가 가장 악화된 곳이 바로 마산이었다.
훗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집권에 항거한 부마 민주항쟁(1979)의 근원지로도 유명한 마산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대규모 가두시위가 일어났고, 이들을 향한 경찰관의 발포로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사망자 발생 이후 시위는 더욱 격화되었으나, 부정 시위를 주도한 내무부 장관의 사임으로 사태는 잠시 진정되었다. 하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마산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한쪽 눈구멍에 최루탄이 박혀있는 참혹한 시신이 되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다. 김주열 군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 시위는 전국으로 퍼졌다.
[이미지 제작=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6기 최시원기자]
이승만 정권은 시위대를 폭력으로 맞이했다. 4월 18일에 시위 참여 후 귀교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정권의 사주를 받은 깡패들에게 습격당했고,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 4월 19일에는 비상 계엄령까지 선포되었다. 민중은 더는 인내하지 않았다. 계엄 선포 당일,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들은 김주열 학생 피살 사건에 대한 분노와 당시 정치 상황을 비판하는 선언문을 배포하며 봉기했다. 4.19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다음은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의 4.19 선언문 중 일부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혹한 시신을 보라! 그것은 가식 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위협)와 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중략)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하에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형제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비록 짧은 글이지만, 글 내면에 담긴 분노와 떳떳함을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많은 학교가 시위에 참여했다. 중앙대학교에서는 ‘의에 죽고 참에 살자’라는 구호를 외치며 가두행진에 나섰고, 이날 실제로 사용된 플래카드가 중앙대학교 도서관에 전시되어 있다. 대학 교수단들은 시국 선언문을 발표했다. 시민들 역시 학생들이 거리에서 시위하는 것을 방관하지 않았다. 독재 정권을 향한 민중의 분노는 강렬했다. 계엄령 선포로부터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전국의 모든 도시는 시위대로 가득했다. 그리고 이들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군부는 전차와 다수의 무장한 보병들을 거리에 투입하였지만, 초등학생까지 섞인 시위대와 조우하자 진압을 포기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시위대 대표단과 면담한 뒤 하야 성명을 발표한다. 1960년 4월 26일의 일이다.
그 날의 거리에 있었던 많은 이들이 오래전에 마지막 숨을 내쉬었지만,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4.19 혁명은 장구한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최초로 국민들이 공화정을 타파한 사건이고, 그 의의는 분명히 깊다. “민주주의는 애국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그해 봄,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수많은 열사가 피를 뿌렸고, 그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자유로운 민주 공화국에서 살 권리를 얻었다. 이러한 지난 세기 우리의 역사는 불변의 진리 한 가지를 알려주고 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는 기꺼이 피를 흘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미래를 얻기 위해 때로는 피를 흘려야 하는 법이다. 총구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선조들의 용기와 희생정신을 본받아, 더욱 나은 세상을 만들자.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국제부=6기 최시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