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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는 진실이 첫 번째 제물이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아이스킬로스가 했던 말이다. 영국의 연출가 제스로 컴튼의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전설과 고전을 각색하여 전쟁 당시 희생되어 잊힌 수많은 이들의 삶과 진실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지난 12월에 공연을 시작하여 많은 관객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내 공연은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 <모범생들> 등으로 호흡을 맞춰온 김태형 연출과 지이선 작가가 함께했다.
트릴로지 시리즈는 각각의 공연이 세 개의 서로 다른 비극으로 이루어진 시리즈로, <벙커 트릴로지>는 지난 2015년 초연, 2016년 재연되어 많은 이들의 관심과 애정을 받으며 성공적으로 끝난 <카포네 트릴로지>에 이어 국내에서 공연된 두 번째 트릴로지 시리즈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리즈인 <프론티어 트릴로지> 역시 국내 공연 계획 중에 있다.
[이미지 촬영=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4기 김단비기자]
무대, 객석으로 들어가는 입구
<벙커 트릴로지>의 세 에피소드는 모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전쟁의 시기 순서대로 본다면 모르가나, 아가멤논, 맥베스 순서이지만, 굳이 순서대로 보지 않거나 셋 중 하나의 에피소드만 보아도 내용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도록 나뉘어 있다. 세 개의 작품을 모두 관람하면, 에피소드들을 관통하는 공통된 상징과 메시지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각 에피소드별로 어떤 전설과 고전을 모티브로 했으며,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점에 주목하며 관람하면 좋을지 알아보자.
1. 모르가나
‘마법, 믿어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모두 마법이에요.’
제 1차 세계대전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모르가나에는 서로에게 ‘원탁의 기사’ 전설에 등장하는 아더 왕과 기사들의 이름을 붙여 부르는 영국 소년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전쟁을 가벼운 등산이나 게임쯤으로 생각한 소년들은 다함께 군대에 자원입대하지만, 열 명의 소년들은 이미 희생되었고, 남은 세 명은 아더, 랜슬롯, 그리고 가웨인 뿐이다. 참혹한 전쟁터, 두려움 속에 지내고 있는 소년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환상을 그려가며 하루하루를 버텨나간다. 세 소년 중 가장 어리고 순수한 가웨인은 무인지대에 나타나는 한 여인의 환상을 본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어린 소년의 말을 귀담아듣고, 함께 노래하고 기도하지 않았던 전쟁 속에서 가웨인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신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기뻐해주며, 의지할 수 있게 한 환상 속의 여인 모르가나에 점점 사로잡혀간다.
모르가나는 헛된 상상에 의지해야만 버텨낼 수 있었던 안타까운 현실을 세 소년을 통해 보여준다. 공연 후반부에 아더가 랜슬롯에게 더 이상 서로를 기사들의 이름으로 부르는 놀이 따위는 그만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사를 들으며 커 버린 소년들이 현실을 깨닫는 모습에 많은 관객들이 안타까운 표정을 짓기도 한다.
모르가나를 관람하는 관객들은 조명과 음악 등의 변화를 통해 현재로부터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과거와 환상의 모습들을 기대해도 좋다. 장면에 따라 매 순간 달라지는 배우들의 연기 역시 매우 훌륭하다.
2. 아가멤논
‘내가 편지를 보냈잖아. 수십 통을 보냈잖아! 아기가 죽었다고, 오빠들이 죽었다고,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그런데 당신은 답장을 하지 않았어. 집에 오지도 않았지!’
제 1차 세계대전 중반을 배경으로 하는 아가멤논은 아이스킬로스의 고대 희랍극 <아가멤논>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아가멤논에는 최고의 저격수라 칭송받는 독일군 알베르트와 그의 영국인 아내 크리스틴이 등장한다. 전쟁에 대한 사명감과 명성 때문에 가정에 신경을 쓸 수 없었던 알베르트로 인해 독일에 홀로 남아야만 했던 크리스틴은 영국인에게 앙심을 품은 한 독일인의 손에 알베르트와 낳은 아기까지 죽자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어지게 된다. 알베르트가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은커녕, 아기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는 것을 안 크리스틴은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 요한과 세운 돌이킬 수 없는 계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는다.
아가멤논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장면은 알베르트와 크리스틴이 마주 앉아 각각 치킨과 사과를 먹는 장면이다. 독일에 있는 집과 전쟁이 벌어지는 벙커 속이 교차되는 공간에서, 집의 문을 열고 들어선 이를 향한 크리스틴의 칼과 벙커에 들어선 이를 향한 알베르트의 총이 결국 서로를 겨누는 연출에는 감탄이 나오기까지 한다. 음식을 섭취하면서도 연기를 하는 배우들의 모습 역시 돋보이는 장면이다.
아가멤논은 처절한 주인공들의 모습에 가장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작품은 수많은 가정을 대변하는 두 사람을 통해 전쟁 속에서 위협받았던 평범한 가족과 피폐한 현실 속에서 그들의 인간다움이 파괴되어가는 모습을 생생히 그려낸다. 전쟁 이전의 행복했던 시절과 냉혹한 전쟁의 시대, 마지막에 드러나는 반전까지 완벽한 스토리를 느끼고 싶다면 아가멤논을 관람하는 것이 좋다.
3. 맥베스
‘꺼져라, 꺼져라 찰나의 촛불이여. 인생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맥베스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막바지에 이르러 종전을 자축하는 전야제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군대에 자원입대한 노동자 계층의 청년 마크는 노력 끝에 대대장으로 진급한다. 그는 야전병원의 간호사인 릴리에게 횡포를 부리는 장군을 찔러 죽이게 되고, 빈 장군 자리를 임시로 맡게 된다. 그는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자비 없고 배려 없는, 권력만을 믿고 기세등등했던 지금까지의 장군들처럼 변해가고, 그렇게 변해가는 마크 장군은 자신을 둘러싼 커다란 계획을 알지 못한 채 전야제에서 공연되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의 주인공을 맡는다.
이 에피소드는 현실과 연극이 매끄럽게 연결되는 연출이 정말 훌륭하다. 촛불이 켜진 상태에서는 전야제 연극 맥베스의 공연이 진행되고, 촛불이 꺼진 상태에서는 전야제 이전에 있었던 일들을 보여준다. 현실의 마크와 극 속의 맥베스가 변해가는 모습이 서로를 상징하기 때문에, 한쪽의 장면이 생략되어도 관객들은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특히 현실에서 일어난 독가스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인물들이 방독면을 쓰면 맥베스에 등장하는 마녀들을 연기하는 모습으로 전환되는 연출을 보고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표한다. 현실과 연극의 구분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명확하도록 표현해낸 데에는 배우들의 역할도 크다. 객석에 앉아 있는 관객들은 배우들이 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표현하는 것부터 숨소리 같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섬세하게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맥베스는 마지막 시기의 에피소드인 만큼, 세 개의 에피소드를 모두 아우르는 메시지를 전하는 결말의 대사도 인상적이며, 관객들이 전야제 연극을 관람하는 군인으로서 작품의 일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한 연출도 돋보이는 작품이다.
세 에피소드를 모두 관람한 관객들에게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관객들의 대답이 전부 제각각이다. 모르가나의 몽환적인 분위기를 선호하는 관객들이 있는 한편, 아가멤논의 안타까우면서도 가슴 아픈 드라마가 취향인 관객들이 있고, 맥베스의 고전적인 매력과 강렬한 에너지에 큰 감명을 받은 관객들도 있다.
<벙커 트릴로지>에서는 밀폐된 극장을 1차 대전의 참호로 실감 나게 구현해냈다. 약 100석밖에 안 되는 적은 객석이 무대를 둘러싸도록 ㄷ자 구조로 배치되어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모호하며, 공간이 매우 좁아 실제 공연 중 배우가 1열 관객의 발을 밟는 경우도 있다. 건너편에 앉은 관객과 마주 보고 앉아 관람해야 한다는 부담감, 객석 간의 좁은 간격과 답답한 공연장이 주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코앞에서 연기하는 배우와 함께 호흡할 수 있고, 70분이라는 길고도 짧은 시간동안 완벽하게 몰입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특이한 벙커 내부에 매력을 느낀다.
병사 1에는 이석준, 박훈, 병사 2에는 오종혁, 신성민, 병사 3에는 임철수, 문태유, 병사 4에는 정연, 김지현이 캐스팅되어 공연을 훌륭하게 이어가고 있다. 여덟 명의 배우 모두 탄탄한 연기를 바탕으로 전쟁이라는 무거운 소재의 작품을 완벽하게 이끌어나가면서 많은 공연 마니아들과 관객들의 만족스러운 평가를 받고 있다.
참혹한 전쟁 속에서 희생된 진실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연극 <벙커 트릴로지>는 다가오는 2월 19일까지 홍익대학교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대한민국청소년기자단 문화부=4기 김단비기자]